나는 언제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고,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영감을 얻는다.
- GUCCIO GUCCI -
구찌오 구찌는 1881년 3월 26일, 이탈리아 피렌체에 구찌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구찌 가문은 대대로 밀집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였는데 구찌오 구찌는 가문의 일이 사양산업이라 판단하여,
17살이 되던 해 1897년 당시 전 세계의 부호들이 모이는 영국 런던의 사보이 호텔(Savoy Hotel)로 갔습니다.
이 곳에서 벨보이로 귀족과 상류층의 최고급 가죽 트렁크를 옮기는 일을 하던 구찌오 구찌는 가죽제품에 흥미를 갖게 됩니다.
가죽제품에 관심이 생기자 상류층의 고급 제품들을 관찰하며 자연스레 상류층 취향과 고급스러운 안목을 가지게 되었고, 부유한 호텔 손님들의 최고급 러기지(Luggage)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구찌오 구찌는 1902년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프란지(Franzi)라는 이름의 가죽 수공예업체에서 가죽 공방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당시 주요 교통수단은 말과 마차였기에 '구찌'가 설립 되기 전 1906년 피렌체에 작은 가죽승마용품 매장을 운영하며,
섬세한 가죽 가공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장인 기술을 결합하여 장갑 및 부츠와 같은 승마 용품을 중심으로 한 가죽 제품을 주로 선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유행이 바뀌듯 마차의 활용이 점차 줄어들고 상류층의 스포츠로 승마 대신 자전거가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구찌오 구찌는 빠른 판단력으로 승마용품 매장을 접고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구찌의 탄생 1921
그렇게 해서 1921년 구찌오 구찌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피렌체에 있는 비냐 누오바 거리에
‘구찌’ 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번째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열었고, 연이어 같은 해 빠리오네 거리에 두 번째 매장을 내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구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찌의 사업 확장 1938
그는 사보이 호텔에서 일하며 상류층의 취향을 익혔던 고급스러운 안목으로 자연스레 귀족들을 위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제품을 만들어 인기를 끌게 됩니다.
사업은 점차 번창하여 구찌오 구찌는 1938년 당시 이탈리아 패션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 부호들이 자주 찾는 쇼핑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로마 콘도티 거리에 새로운 구찌 매장을 열어 작업장을 확장하였고 핸드백, 트렁크, 장갑, 신발, 벨트 등 생산 제품을 좀 더 다양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찌의 가죽 제품은 승마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특히, 승마용품인 홀스빗(Horsebit, 말 재갈. 보통 쇠로 만들며 굴레가 달려 있어 여기에 고삐를 맨다)과 등자를 활용하여 가죽용품에 장식하는 것은 구찌의 고유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구찌의 경영위기 그리고 극복
1940년대 구찌오 구찌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말기의 위기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했습니다.
모든 물자가 전쟁에 동원되고 국제연맹이 이탈리아로 수출 금지령을 내려 금속, 가죽 등의 소재가 부족했던 시기였고,
구찌오 구찌의 사업을 돕고 있었던 첫째 아들 알도 구찌는 가죽의 대체 소재로 대마, 삼마, 황마, 대나무 등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알도 구찌는 이탈리아 나폴리산 대마와 삼마를 이용하여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서로 연결되는 형태로 직조하고 이를 여행 가방에 사용했습니다. 이로써 탄생한 구찌의 디아만테(Diamante) 캔버스는 구찌의 첫 시그너처 프린트가 되었습니다.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물자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수많은 이탈리아의 가죽 업체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첫째 아들 알도 구찌는 일반적인 가죽 대신 돼지피혁(스웨이드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을 활용하는 대안을 찾았습니다. 유일하게 수입 가능했던 일본산 대나무를 손잡이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내놓았으며,
이처럼 전쟁 후의 위기는 오히려 구찌의 뱀부 백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족 경영의 시작
구찌오 구찌는 구찌를 직접 경영하며 세 아들 알도 구찌, 바스코 구찌, 로돌프 구찌를 회사의 주주로서 경영에 참여시켰습니다.
1951년 로돌프 구찌는 밀라노 몬테나폴레오네 거리 5번지에, 2년 후인 1953년에 알도 구찌는 뉴욕 58번가 사보이플라자 호텔에 구찌 매장을 열었습니다. 이로써 구찌는 뉴욕에 진출한 최초의 이탈리아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구찌오 구찌의 사망 그리고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
1953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첫째 아들인 알도 구찌와 셋째 아들인 로돌프 구찌가 각각 50%씩 경영권을 나눴고, 알도 구찌는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발산하며 구찌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알도 구찌는 1961년 창립자이자 아버지인 구찌오 구찌의 이름을 딴 GG 로고를 만들고 이를 캔버스 소재로 만들어 가방, 액세서리, 옷에 사용했으며
같은 해 더 웹 장식과 싱글숄더 스트랩의 디자인의 호보백을 출시하였고, 유명인사 재클린 케네디가 들고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재키 백(Jackie Bag)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가방입니다.
또한 알도 구찌는 1961년 팜비치, 1968년 비버리 힐즈를 비롯하여 1972년 도쿄와 1974년 홍콩에 구찌 매장을 내며 구찌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가족경영의 위기
1982년, 구찌는 가족 경영진의 결정을 통해 디자인부터 생산, 유통까지 전 과정을 맡아 경영하는 S.P.A로 전환하고 로돌프 구찌가 경영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년 뒤, 로돌프 구찌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마우리초 구찌에게 자신이 가진 구찌 지분 50%를 상속하여 자연스레 마우리초 구찌가 최고 경영자가 됐습니다.
이에 알도 구찌의 아들인 파울로 구찌는 당시 디자이너 였는데 크게 반발하며 핸드백, 액세서리, 와인 등을 판매하는 저렴한 세컨 브랜드를 만들어 무분별한 라이센스 남용으로 구찌의 이미지를 저렴하게 만드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브랜드의 이름은 구찌 플러스 였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전통의 가족 경영에 위기를 불러왔고, 화가난 알도 구찌는 파울로 구찌를 해고 하게 됩니다.
전문 경영인 체제로 변화
마우리초 구찌는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1989년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의 뉴욕 지사장 돈 멜로를 구찌의 디자인 총괄이사로 영입했으며,
돈 멜로는 구찌에 새로운 디자인 팀을 꾸렸습니다. 훗날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당시 29세의 디자이너 톰 포드도 이때 구찌 디자인 팀에 합류했습니다.
워싱턴의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도메니코 데 솔레를 구찌 아메리카의 사장 겸 관리이사로 영입했습니다.
이로써 구찌에 전문 경영인 시대가 시작되었고,
도메니코 데 솔레는 유통을 직접 통제하는 동시에 그동안 남발했던 10만여종의 달하는 구찌 브랜드의 라이센스 상품을 대폭 축소하고 프랜차이즈도 환수했습니다.
아랍계 투자 회사 인베스트코프는 1987년부터 구찌의 지분을 인수해왔는데 1989년 인베스트코프는 구찌 주식의 50%를 매입했고
1993년 마우리초 구찌가 자신이 보유한 50%의 주식 지분을 매각하면서 인베스트코프가 회사의 전체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구찌 내부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1995년 돈 멜로는 구찌를 떠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의 회장으로 돌아갔고,
도메니코 데 솔레는 CEO(최고 업무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완전한 주식회사가 되었으며, 뛰어난 사업가와 천재적인 디자이너(톰 포드)의 화합으로 구찌의 명성은 다시 올라가게 됩니다.
디렉터 영입
1994년 새로운 수석디자이너로 임명된 톰 포드는 컬렉션은 물론 선글라스, 향수, 광고, 매장 등 구찌의 모든 외양을 책임지는 새로운 수석디자이너로 임명 되었습니다.
톰 포드가 1995년에 선보인 구찌의 젯셋 글래머 테마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로고, 홀스빗 등 구찌의 고유 장식과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특유의 포르노 시크, 관능미와 자극성을 살린 과감하고 파격적인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며, 전통과 새로움을 동시에 부각했습니다.
무엇보다 톰 포드가 매장과 광고 이미지까지 일괄적으로 감독하면서 새로워진 구찌를 특히나 젊은층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구찌의 변화는 성공적이었고, 톰 포드 이후 패션계에서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수석 디자이너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매장 구성과 광고까지 진두지휘하며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포지션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 구찌는 구찌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고 당시 피노 프랭탕 레두트(Pinault Printemps Redoute)였던 PPR 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맺어 독립그룹이 아닌 럭셔리 대기업 소속이 됩니다.
2004년 톰 포드는 자신의 마지막 컬렉션을 선보이게 됩니다. 구찌의 변화를 주도했던 톰 포드와 도메니코 데 솔레가 재계약에 대한 PPR 그룹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구찌를 떠났습니다. 톰 포드의 계약 해지로 인해 구찌의 주식은 바로 하한가를 맞이하게 됩니다.
PPR 그룹은 이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이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CEO 마크 리와 프리다 지아니니 였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프리다 지아니니는 전 펜디(Fendi)의 핸드백 디자이너였고 2002년 구찌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맡은 액세서리 라인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 2006년 그녀는 구찌 전체를 단독으로 총괄하는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브랜드를 맡은 후 4년간 구찌의 매출은 46% 신장했고, 구찌는 2007년 시장조사전문회사인 닐슨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갖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프리다 지아니니는 새로운 트렌드 변화로 인해 2014년 12월에 수석 디자이너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현재 수석 디자이너는 2015 F/W 패션쇼로 데뷔한 알레산드로 미켈레입니다.
다시 찾아온 경영위기 그리고 구세주
로고리스 말 그대로 로고가 들어나지 않는 열풍이 불게 되면서 로고 자체를 들어내어 딱 봐도 어느 브랜드인지 강조가 되었던 상징적인 구찌백은 선호 하지 않았으며 과거의 역사속으로 남게 되면서 구찌가 해마다 매출이 20% 이상 줄어드는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기 시작 합니다.
그러나 이 경영난을 극복하게 만든 인물이 등장 합니다. 이름은 알렉산드로 미켈레 1972년생 로마출신으로
2002년 구찌에 입사해 일을하며 전 수석 디자이너 프리다 지아니니의 전속 후임디자이너로 지아니니와 함께 활동 했습니다.
2014년 프리다 지아니니가 파트리지오 디 마르코CEO와 구찌를 떠나자 알렉산드로 미켈레 또한 회사를 떠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계획은 실행 되었고,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는 공석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5년 1월에 CEO로 임명된 마르코 비자리가 미켈레에게 차 한잔하며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고 당시에는 이미 구찌를 떠난 상태였던 미켈레가 거리낌 없이 마르코 비자리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미켈레는 마르코 비자리에게 전화 한 통을 받게 되는데 이 전화 통화 내용 중 일부가 "프리다 지아니니가 제작하다 말았던 남성복 컬렉션을 재구성하여 일주일 안에 패션쇼를 준비할 수 있겠는가?" 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미켈레에게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넘겨주려 한 것이죠.
미켈레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새로운 구찌: 비적합주의자, 낭만주의자, 지성인"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컬렉션을 발표했습니다.
이틀 후, 케링 그룹은 매출 하락세였던 구찌의 제품들을 재창조할 목적으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정식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처럼 미켈레는 '무명 디자이너'라는 대중들의 편견과 근심 걱정들을 떨쳐내버리며 성공적으로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데뷔를 하게 됩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의상의 디테일들을 살려내었고 관객들까지 매료시키며 여유롭게 쇼를 장악해 나갔습니다.
마르코 비자리의 안목 덕분에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구찌는 다시 한번 위상을 회복하며 매출 또한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구찌 브랜드 및 기업 정보
구찌의 모기업 PPR 그룹(피노 프랭탕 레두트 Pinault Printemps Redoute)은 2013년 케링 (Kering) 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구 PPR 그룹은 1963년 프랑수아 피노에 의해 설립된 프랑스 럭셔리 패션 그룹으로서 2000년 구찌 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바 있습니다. 사명을 케링 그룹으로 변경한 이후 유통 사업을 정리하고 명품, 의류, 액세서리 브랜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케링 그룹은 구찌 이외에 보테가 베네타, 생 로랑, 알렉산더 맥퀸, 발렌시아가, 부쉐론, 브리오니, 스텔라 매카트니 등의 의류, 액세서리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구찌의 새로운 기술 및 패턴 종류
디아만테(DIAMANTE)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죽이나 금속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졌을 때 창립자 구찌오 구찌 첫째 아들 알도 구찌는 대마, 삼마, 황마를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서로 연결되는 구조로 직조하여 가죽을 대신할 원단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여행가방을 제작하여 디아만테 캔버스가 만들어졌습니다.
더 웹(THE WEB)
세 가지 컬러가 조화된 구찌의 더 웹은 1951년 말 등에 사용하는 안장띠의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그린-레드-그린’ 컬러 조합이 기본으로 흔히 ‘GRG’라고도 불리며, 이를 응용한 ‘블루-레드-블루’ 컬러 조합은 ‘BRB’라고 불립니다.
GRG 더 웹은 오랜 세월에 거쳐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는데 1950년대에는 여행가방, 1961년에는 재키 백, 1970년대에는 A라인 스커트에 자주 사용되었고 프린트나 가죽 패츠워크로도 변형되었습니다.
1961년에 처음으로 선보인 GG 로고와 더불어 구찌의 제품임을 한눈에 각인시키는 구찌의 홀마크(Hallmark, 품질보증마크)로 사용됨과 동시에 특유의 스포티한 분위기로 구찌의 젊고 세련된 감각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플로라(Flora)
플로라는 구찌오 구찌의 아들인 로돌프 구찌는 1966년, 모나코의 왕자비 그레이스 켈리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로돌프 구찌는 구찌매장에 방문한 그레이스 켈리에게 선물하고 싶으니 제품을 하나 고르라고 권했습니다.
그녀는 스카프를 원했는데 당시 구찌에는 스카프가 없었습니다. 로돌프 구찌는 특별한 손님에게 단 하나의 스카프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음 날 꽃과 열매,곤충이 어우러진 구찌 플로라 패턴이 탄생되어 오늘날까지도 구찌 시그니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시마(SSIMA)
2006년, 당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엑터였던 프리다 지아니니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과거 구찌의 아이콘들이 다시 연구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습니다. 특히 최고급 가죽위에 GG로고가 프린트된 시그니처 레더 컬렌션 '라 펠르 구찌 시마' 라인은 GG로고와 홀스빗 모티가 새겨진 두 가지 스타일로 론칭되며, 구찌의 또 다른 시그니처로 등극되었습니다.
마이크로 시마(MICRO SSIMA)
마이크로 시마는 클래식한 구찌 시마로고를 말 그대로 작게 만든 GG 구찌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지르설운 디자인입니다. 시마 가죽은 소가죽으로 외부 충격이나 내구성이 튼튼한 장점이 있으며,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구찌내에서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있습니다.
GG수프림 캔버스(GG SUPREME CANVAS)
GG수프림 캔버스 소재에 GG로고 패턴과 시그니처 더 웹 스트라이프가 겸비된 디자인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담아 놓았으며 트렌디 하면서 구찌 특유 디자인이 특징입니다. GG수프림 캔버스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계절에 상관없이 매치하기 좋은 무난한 컬러와 디자인으로 구찌의 다양한 제품들에 사용되며 꾸준한 인기를 얻고있습니다.
애니멀리어(ANIMALIER)
구찌 하우스의 현 수장인 알렉산드로 미켈레에 의해 만들어진 꽃, 나비, 새, 잠자리, 도마뱀 등 자연을 이용한 애니멀리어 디자인은 자수와 프린트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차갑고 획일화된 도시 스타일에 지친 사람들의 감성을 어루 만지며, 세계 패션의 중심이 됐고 젠더 플루이드 트랜드를 제시하며, 신선함을 주어 전 세계적으로 품절 대란을 일으킬 만큼 많은 사람을 받고 있습니다.
구찌 하드웨어 종류
GG마몬트 (GG Marmont)
엔틱골드 더블G 메탈 장식
홀스빗 (Horsebit)
승마용품의 말재갈을 뜻함.
gg마몬트와 함께 구찌의 대표 상징
주미 (Zumi)
구찌의 인터로킹GG & 홀스빗 을 결합하여 만든 디자인
인터로킹 (Interlocking)
GG 겹쳐져 있는 모양의 하드웨어
실비 (Sylvie)
메탈체인 모양의 하드웨어
페들락 (padlock)
아카이브 디자인을 차용한 키 잠금장치 디자인
디오니서스 (Dionysus)
크리스탈장식 타이거헤드 잠금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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